지난 주말 회사 분들과 함께 K리그 올스타와 J리그 올스타와의 경기가 있었던 도쿄국립경기장에 다녀왔습니다. 8월 첫 주말, 아주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K리그 올스타가 초반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며 J리그 올스타를 3:1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좌우를 휘짓고 다니던 최성국의 플레이가 돗보였던 게임

사실 초반 3백을 활용한 K리그 올스타의 플레이는 4백을 쓴 J리그 올스타에게 좌, 우 양 윙과 윙백의 오버래핑에 계속 공간을 내주면서 아찔한 순간도 참 많았습니다. 욘센과 정대세 선수에게 실제로 연결된 크로싱과 패스도 많았지만 이 두 선수는 끝끝내 한방을 결정지어주질 못하더군요. 반대로 한국 수비수들의 몸을 날리는 수비는 세련된 맛은 없었지만 상대방을 질리게 할만큼 꽤 투지있었던 플레이였습니다. K리그 서포터 석에서 보았던 저도 몸을 날리는 플레이는 열심히 볼 수 있었습니다.

K리도도 마찬가지로 도쿄의 뜨거운 더위 때문인지, 어웨이 경기에 대한 긴장감 때문인지 전반 내내 제대로 공간을 만들면서 뛰지도 못하고 패싱도 상당히 정확도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전반 30분이 넘어가면서 경기 초반 왼쪽에서 뛰던 최성국이 오른쪽으로 포지션을 체인지하고 나서부터 조금씩패싱력과 조직력이 살아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최성국의 발 끝에서 한 골 터져나왔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K리그 올스타의 2번째 골: 패널티 킥


경기장에서 보아도 유일하게 스스로 공간을 만들어내던 선수가 최성국이었는데 침착히 골을 넣었죠. 그리고 후반에는 어시스트를 해주면서 MVP를 수상하는 영광도 맞이했습니다. 세번째 골은 J리그와는 다른 '결정력'을 보여주는 멋진 골이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MVP를 받은 최성국


한국 축구. 늘 리그전에 대한 관심이 저만 해도 없었고 이번 경기를 보면서도 한국선수들 면면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국가대표'중심으로 운영이 되기도 하고 팬들도 국가대표 경기에만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번 게임으로 인해 리그 경기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아직 저도 야구와 비교할 때 '서포팅'을 하는 팀이 없다는 점...에서 지속적인 관심을 갖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블루윙즈 젓지를 입고서 경기장을 찾아준 수원팬들이나, 오늘 경기장을 가득 매워준 일본 축구팬들(약 2.7만여명이 찾아왔습니다)에게서는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또한 반대로 그런 꾸준한 서포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성적을 올려주는 선수들에게도 고맙고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 K리그 서포터석을 채운 블루윙즈 서포터들


경기는 이겨서 좋았지만 왜 한국축구리그는 그렇게 인기가 없는가에서 잠깐 우울해졌습니다. 한국의 놀거리(술, 유행문화 등)가 많고 다른 축구리그가 있어, 대체제가 많은 것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그냥 제 어린 경험부터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 서포팅하는 축구구단 있었나요? 그럼 지금은? 미디어로부터의 소외와 지역 경쟁구도 부재


어린시절을 생각해보면 야구는 자주열렸던 탓에(1년에 126경기씩 소화를 하니깐요) 뉴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었고, 실제로 좋아하는 팀도  쉽게 고를 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을 상기하면 스포츠신문의 1면은 늘 지역에 맞춰서 편집이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는 일간스포츠를 봤었는데 1면은 늘 야구였고, 늘 삼성이야기였습니다. 삼성이 저더라도요.

이런 미디어의 서포트도 역시나 80년대, 90년대에 야구를 국민스포츠로 올려놓는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저의 경우에는 집안의 분위기를 따라 해태를 계속 서포트하고 있습니다만, 아버지의 회사로 인해 LG어린이 야구단에 가입하여 초등학교시절에는 LG 트윈스 마크가 찍힌 잠바를 입고 학교에 가기도 했었죠. 제가 다니던 곳에서는 대부분이 삼성팬이었었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설전이 이뤄집니다. LG와 삼성에 대해서요. 그리고 고교 축구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역시 봉황기, 청룡기 등의 고교야구도 곧잘 챙겨봤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확실히 지역기반의 경쟁구도가 잡혀 있었던 것이 야구였죠.

반면 축구는 제가 그렇게 서포팅하던 팀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야구보다 늦었던 1983년쯤 프로리그를 만들고, 연고지를 만들기는 했지만 그렇게 연고지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는 않았었고 경기가 많아서 TV로 자주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어린시절에는 정말 학원가거나 TV보거나 둘 중에 하나만 했던 것 같은데 그 때 이미 미디어에서 밀려난 축구는 야구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죠. 또 지역기반의 경쟁구도보다는 대우, LG, 유공(지금은 SK), 포철 등 대기업간의 경쟁으로 인식이 되었던 것 같고요. (이건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고, 제 느낌에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의 야구에 대한 인기는 어린 친구들이 아닌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 야구를 좋아하고 특정팀을 응원하던 어린이들이 '경제적 능력'이 생기면서 가족단위의 관객이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야구를 좋아했던 남편, 남자친구가 여자친구, 아이들도 같이 데리고 오는 선순환구조가 조금씩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런 순환구조에서 물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의 복귀와 현재 벌어지는 순위전이 '즐거움'을 주면서 처음에는 그냥 야구장을 찾았던 관객들도 그 재미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온라인 야구게임의 대부분의 과금유저들이 20대후반~40대 초반 유저라는 사실도 현재 프로야구의 팬층이 누구인가를 잘 알게해주는 본보기입니다. 반대로 온라인 축구게임에서는 국가별 대항전 혹은 역시 유럽클럽팀을 선택하여 축구를 대부분 하게 됩니다. 유저는 10대~20대 초반의 유저가 많은 편이고요. 사실 야구장에 가보면 중고등학생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친구들을 축구장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오늘 경기를 찾은 약 2만7천여명의 관객들



대한민국 남자의 아이러니: 운동은 축구를 하지만 응원은 야구를

그런데 어린시절에 가장 많이하던 운동은 또 '축구'입니다. 공하나만 있으면 되는 편의성과 룰의 단순성(어린시절에는 오프사이드 이런거 모르죠. 오히려 자유킥이라고 하면서 적은 수로도 축구를 합니다)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야구공, 글러브, 포스마스크 등의 많은 장비가 필요하고 규칙도 까다로운 야구보다는 접근성에서는 정말 앞설 수 밖에 없습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아마 실제로는 축구를 많이하면서도 서포팅은 야구를 하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상황'을 다 겪어봤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군대를 가면 또 대부분 축구를 하면서도요.

역시나 어린시절부터 이어진 야구에 대한 인기가 서포팅할 축구팀을 만들게 하지 못하였고, 그러면서 리그에 대한 관심을 많이 끄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미디어들도 대부분 야구에만 관심을 쏟아부었던 것 같고요. 사실 차범근이란 신화적인 인물이 80년대 한국에서 큰 조명이 되지 않았던 것도 당시에는 '야구'중심의 스포츠 보도(이 부분은 편집과 기자들간의 역학관계도 되겠죠)의 영향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어린 중고등학생들은 스포츠를 찾는 새로운 관객층이 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학교를 마치면 학원을 가는 일상에 지쳐있는 청소년들이 직접 경기장을 찾기는 어렵죠. 물론 이친구들은 대부분 여가시간에는 '게임'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20대 후반~40대의 기존 층들은 이미 응원하는 야구팀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축구에 여력을 쏟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방법이 없는건가요. 저도 축구는 정말 좋아하면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참 답이 없네요...

조금은 우울해보입니다. 이번 JOMO컵도 역시 한일전의 대리전의 성격이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지만 과연 다시 리그전에 관심을 갖을 수 있을까요. 이번 경기의 방송권도 지상파에서는 구매를 않고 케이블에서 구매를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그랬을까요. 시청률이 중요하고 '돈'이 중요하니깐 이해는 됩니다만 역시 미디어의 태도가 사람들의 관심을 만들어 내는 역할을 얼마나 하는지는 중요합니다. 인터넷이 뜨면서 소위 영화의 조연배우였던 연기파배우들의 입지만 커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일본만 보아도 인기는 야구가 압도적이지만 축구경기장은 평균적으로 2~3만명은 채우고 경기를 시작합니다. J리그 초반 창설부터 '지역기반'의 경쟁을 만들고 서포트라는 것을 알게모르게 은연중에 강조한 것이 일본인들도 인식하게 된 것이죠. 또한 일본 특유의 다양성에 대한 문화가 축구를 야구에 묻히지 않고, 인터넷놀이란 다른 여가활동(엔터테인먼트)에 묻히지 않고 살아 남게한 원동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민구단창설, 어린이 축구교실강화로 뒤 늦게 지역기반의 서포팅을 심어가고 있지만 정말 무언가 뽀족한 방법이 없을까요?

 
Posted by Simon Cheong


7월 마무리된 Activision Blizzard의 탄생으로 세계 게임업계에서 2위로 밀려날지도 모른다는 EA. 지금까지 소위 Eat All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게임업계를 호령했었지만 조금씩 멀리 밀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EA는 약 3조원에 이르는 순현금을 바탕으로 여전히 변화하는 환경에서도 빠르게 신규플랫폼으로 전략적으로 이동하며 잘 적응 중입니다. 사업포트폴리오도 그 누구보다 잘 갖춰져 있습니다. 최근의 실적악화로 인해 EA를 이빨빠진 호랑이처럼 여기는 시각들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급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올 1분기 실적발표 기사보기) 언제 어디서 마주치든 긴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게임, 엔터테인먼트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누구나 배워야하는 벤치마킹, 스터디 케이스의 사례입니다.

물론 위 시각은 경쟁사로서의 입장이고, 투자자의 입장이라면 현재의 valuation에서 투자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1년 매출 4조(올해는 5조를 예상), 콘솔게임기의 발매에 영향받는 불안정한 이익률, 순현금 3조를 보유하지만 약 PER 30~40, EV/EBITDA 20이상을 줘야한다면 망설일 수 밖에 없습니다. 투자이야기는 여기서 각설하고 이번 포스트는 그냥 가볍게 EA의 역사와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규 사업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미국서부에서 바뀐 운명: 게임을 좋아하고 PC의 성장을 본 Mr. Hawkins

EA는 1982년 Apple Inc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던 Trip Hawkins가 설립을 하게 됩니다.

Trip Hawkins가 창업자인데 이 아저씨는 Harvard를 졸업하고, MBA를 하기 위해서 Stanford로 건너옵니다. 동부에서 서부로 건너왔는데, Stanforad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본 것이 바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발명과 미국 가정집으로 퍼지고 있는 PC의 성장성입니다. 아마도 Harvard에 있었으면 못봤을 것을 Stanford로 건너와서 이 아저씨는 운명을 바꿀 '현상'들을 눈 앞에서 보게 된 것이죠.

사용자 삽입 이미지

* EA의 창업자, Trip Hawkins


Standford를 졸업한 1978년 그난 첫 직장으로 Apple Inc.을 들어가게 됩니다. 그가 회사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Apple은 1976년에 세워진 후 고작 컴퓨터 1000대만을 팔았었고, 직원수는 약 50명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Trip Hawkins는 직접 PC가 얼마나 빠르게 팔리는지를 봤는데 그가 회사를 그만 둘 1982년에 Apple은 Fortune이 선정하는 500대 기업에 들어가고, 4000명의 직원을 가진 10억 달러에 매출을 내는 회사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 빠른 PC의 보급이 그를 결국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도록 자극하게 됩니다. 사실 Trip Hawkins는 평소에 보드게임종류를 너무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과 즐거운 기분으로 즐겼고 PC가 왠만큼 깔리면 게임회사를 차리겠다는 생각을 실현한 것이죠. 물론 때 마침 있었던 Apple의 상장으로 이분도 한몫 단단히 챙기셔서 '종자돈'은 마련해서 1982년 1월에 Apple을 그만둔다는 의사를 밝혔고, 회사가 끈질기게 잡아두어서 결국 4월까지는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EA: 결국 1982년 5월, Sequoia의 문칸방에서 시작

Trip Hawkins는 Apple을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난 1982년 2월에 Sequoia Capital의 Don Valentine(이분이 Sequoia의 설립자시죠)과 자신이 설립할 Amazin' Software(당시 EA의 이름이 지어지기 전에 이렇게 불렸습니다)의 펀딩에 대해서 논의를 하였습니다. 아마도 Sequoia가 Apple의 초창기 투자자였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알고지내던 관계였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Sequoia가 Trip Hawkins에서 그러면 아예 Sequoia의 빈방이 있는데 거기서 한번 사업을 시작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시작되면서 EA의 모태는 시작이 되게 됩니다.

여기서 Sequoia Capital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드리면, 미국 Venture Capital에서는 엄청나게 유명하고 실력있는 회사입니다. 대부분은 First, Second Round Funding을 많이 들어가는데 그들이 투자를 한 회사만 보아도 후덜덜 합니다. Apple (1978년), Electronic Arts (1982년), nVidia(1993년), Yahoo! (1995년), Google (1999년), Paypal (1999년), LinkedIn (2003년), Youtube (2005년) 등 전세계를 휘어잡고 있는 회사들이 참 많습니다. 북미에서는 Sequoia면 밸류에이션을 조금 적게받더라도 레퍼런스를 위해서라도 투자를 받고 싶어합기도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Sequoia Capital: 마이더스의 손이죠?


여하튼 EA는 우선 작게 Sequoia의 작은 방에서 먼저 1982년 5월에 설립이 되고, 이후 Apple에서 같이 일을 하던 Rich Melmon, Dave Evans 등이 조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11명의 임직원이 되었던 때쯤 Sequoia의 셋방살이를 벗어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게 되죠.


Amazin' Software -> Electronic Arts : Developer도 Artist다.

EA의 이름은 사실 처음부터 지어진 것은 아니고 임직원들의 아주 긴 회의 이후에 결정이 된 것 입니다. 처음에 Trip Hawkins가 회사를 설립할 때는 이름이 Amazin' Software였지만 이에 대해서 그다지 직원들은 만족해하지 않고 새로운 회사 이름을 만들자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82년 10월 12명의 직원과 외부 광고 에이전시를 불러 밤을 세우면서 토론하며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이름을 고를 때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피곤한 사람은 그냥 가면 바로 투표권을 박탈당하는 방식으로요.

Hawkins는 Developer를 Artist로 이야기를 하고, 포지셔닝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나온 제안이 SoftArts였지만 당시 Software Arts라는 회사가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고안했습니다. 그래서 회의장에서 나온 이름이 Electronic Arts와 Electronic Artists, Blue Light 였습니다. 그리고 그 중 누군가가 Developer는 Artist가 아니라는 '도발적이고', '자극적인'발언을 하면서 오히려 대세는 Electronic Arts로 넘어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EA의 첫 Logo (사각형과 원과 삼각형의 조합)


EA는 그리고 Developer를 정말 Artist로 포지셔닝 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게임 Title을 뮤지션들의 앨범과 비슷하게 멋진 커버를 그려주고, 개발자들의 Profile을 넣어주는 방식으로 개발자들에게 모티베이션을 주었습니다. 1980년도에 태어난 제가 그당시가 어땠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음. 아무리봐도 Developer들에게 Artist와 같은 포지셔닝을 시키고, 또한 스스로 하여금 자존감을 느끼게 Profie을 넣어주는 방식은 참 획기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런 방식은 우수개발자들을 모으는데 있어 꽤 효과적이었다고 하며, Product별 인센티브 제도를 운영하면서 타 회사들보다 더 좋은 금전적 보상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최근이야 엄청난 노동강도로 인해 EA를 떠나는 사람이 많다는 걸 Vancouver에서 EA Sports에서 근무했던 동료에게 들은적도 있고 인수합병이후의 강제적인 관리로 문제를 사고는 있지만, 초창기에는 EA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1983년에 첫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합니다. 바로 Hard Hat Mack, Pinball Construction Set, Archon 등의 게임입니다. 마치 Rock Album과 같은 느낌으로 Package를 해서요. 그리고 당시 새로운 Packaging은 언론들의 관심을 받았고, 실제 게임도 유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이들은 재무적으로 성공하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EA의 초창기 게임 Title들


또한 스포츠하면 떠오르는 EA를 만들어준 그 시작점인 Doctor J and Larry Bird One on One 이라는 농구게임을 발표합니다. 여기서 Doctor J는 Julius Erving이죠. 그리고 이 작품의 성공과 1984년에 EA에 합류한 Larry Probst(이 아저씨가 Hawkins이후 CEO를 역임하셨죠, Sales 담당자였습니다.)은 EA로 하여금 '유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들게 합니다. 잘팔리는 작품인데 꼭 'Publisher'를 낄 필요가 있을까? 직접 Publishing을 하자고.. 그리고서 실제로 Lucasfilm, SSI 등의 게임도 배급하는 Publisher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EA는 이러한 직접 유통, 퍼블리셔로의 전환은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 선택과 더불어 EA는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한 투자도 서슴치 않습니다. 언젠가는 스스로가 퍼블리셔가 되기위해서, 최종 소비자가 자신들을 찾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전략은 엄청난 성공을 가지고 옵니다. 첫해 1983년 약 5백만 달러의 매출, 1984년 약 11백만 달러의 매출, 1985년 약 18백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하며 승승장구 성장해갑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PC의 보급이 시작되었던 '시장의 성장'속에서 톡톡히 그 과실을 따먹은 셈입니다.

그렇게 성장한 EA도 물론 어려움도 있었으나, 잘 극복해서 지금까지 왔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그러면 EA의 성장방식에 대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포스트를 나눠서 올립니다.


Posted by Simon Cheong


촛불시위 이후 ‘아고라’로 몰려든 유저가 검색으로 유입이 될까? 그와 관련하여 재미난 기사가 나왔습니다. (기사보기)  본 기사에서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작년 10월쯤 Naver가 대선과 관련하여 ‘중립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정치뉴스에 대한 댓글을 제한하면서부터 사실 적극적인 네티즌들은 ‘Naver’를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Naver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물밑에서 이미 논의가 시작되었고, Naver는 스스로의 정책 결정과 인터넷 환경변화와 유저행동에 대한 대처방식에서 균열을 하나 둘씩 만들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당시 Naver는 자살골까지는 아니겠지만, 너무 쉽게 경기를 있던 나머지 심판의 눈치를 너무 보면서 백 패스를 했다고 봅니다.

때 마침 적극적인 미디어 정책을 강조하면서 블로거 뉴스, 티스토리 인수 등으로 인터넷의 얼리어답터(기술습득이 빠르고, 컨텐츠 생산력이 좋은)를 하나, 둘 흡수한 Daum은 뉴스에서부터 그 균열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작년 10월에 이와 관련해서도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포스트 보기)


Daum 주간 검색점유율 3년 만에 15%를 넘어서다: 메인검색 4%P, 지식검색은 5%P증가

그리고 작년 10월부터 보이기 시작한 Naver의 균열이 ‘촛불시위’에게 토론의 장을 열어준 Damu의 아고라의 힘에 공명현상을 일으키며, Daum은 야금야금 검색시장의 점유율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동안의 Daum의 ‘카페DB 추가’ 등의 검색으로의 노력을 했지만 역시 적극적 ‘미디어 정책’의 영향이 큽니다.

아래는 주간기준의 Korean Click 주간 통합 검색 점유율 추이입니다. 촛불시위가 본격화되고 6월10일 촛불시위가 이뤄진 이후 더욱 많은 뉴스들 (광우병, 보수언론들과의 대결구도 등)이 등장하면서 Daum의 점유율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6월 둘째 주부터 약 3.6%P의 검색점유율 증가가 이뤄졌고, 반대로 Naver는 3.3%P의 검색점유율 감소가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Total 검색 점유율 추이 (Source: Korean Click)


주요 검색카테고리 중에서도 총 검색페이지의 약 50~60%를 차지하는 메인검색과 20%를 차지하는 지식검색에서 Daum의 약진이 돋보입니다. 아래는 실질적인 Daum의 검색점유율이 증가하고 난 이후인 6월 둘째 주부터의 메인검색과 지식검색의 점유율 추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Main 검색 점유율 추이 (Source: Korean Click)

Daum의 점유율이 약 4%P증가, Naver의 점유율이 약 4%P감소하였습니다. 타 검색엔진의 점유율은 변화가 거의 없던 것으로 볼 때는 Naver에서 Daum으로의 트랜지션이 많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지식검색 점유율 추이 (Source: KOrean Click)

주목할 점은 지식검색부분입니다. Daum이 4월 신지식검색을 개편하면서 카페DB등도 개방을 하였습니다만, 어느 정도 지식DB가 쌓인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인지 Naver의 독점서비스라고 볼 수 있었던 지식검색에서도 무려 5%P가 증가하였습니다. Naver의 검색의 가장 큰 Killer Title이었던 ‘지식검색’에서의 감소는 불안해 보입니다. 특히 그간 ‘지식검색은 Naver’란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믿음에서 네티즌들은 Daum의 적극적인 검색엔진 광고와 의도적인 불 이용으로 조금씩 그 믿음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왜 갑자기 6월 둘째 주 이후 검색점유율이 증가하였는가? 패널변경? 방학효과?

PD수첩에서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한 것은 4월 29일입니다. 그리고 촛불문화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5월 중순입니다. 하지만 6월 둘째 주부터 Daum의 수치가 갑작스럽게 증가하였습니다. 오히려 5월 동안에는 Naver는 약 1%P정도 검색점유율이 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6월 둘째 주 (6월 9일부터) 모멘텀을 받았을까요?

우선 Korean Click측의 패널 변경 등의 조사방법 변경이 있었나 살폈지만, 조사방법의 변경은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고려한 것은 대학생들의 방학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인터넷 사용이 많고 또한 정치적인 성향에서, 특히 광우병 관련 문제에서는 반 정부의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따라서 검색이용량을 연령별로 구분하여 연령별 점유율을 살펴보았습니다.

단 아래 페이지는 Page View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기 때문에 앞서 보여준 Time Spent기준의 점유율과는 소폭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연령별 검색 사용 점유율 (Source: Korean Click)


연령별 검색 이용점유율은 해당기간 동안 대학생 층은 감소를 하였고 오히려 중고등학생층이 더욱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고등학생의 기말고사가 이어진 7월초에도 오히려 중고등학생층의 검색 이용점유율은 더욱 증가하네요.


초등학생층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Daum의 점유율 증가: 정지마찰력은 넘었다.

지금부터는 점유율을 연령대별로 구분하여 보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7~12세 연령층의 검색 점유율

7~12세의 초등학생층입니다만 Naver의 압도적인 1위가 지켜지고 있고, Daum과 Naver의 점유율의 변동은 크지 않습니다. 큰 일관성도 없어 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3~18세 연령층의 검색점유율


13~18세의 중고등학생 층입니다. Daum의 점유율이 약 3%P증가하였습니다. 즉 중고등학생 층의 검색이용 점유율은 연령대비 높은 증가를 보였지만 특별히 Daum의 점유율이 증가했다고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19~24세 연령층 검색점유율

대학생 계층은 Daum으로 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25~29세 연령층 검색점유율


25~29세 층은 Daum이 증가를 한 후 7월 이후 유지되는 모습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30~34세 연령층 검색점유율


30~34세에서는 Daum의 점유율이 가파르게 상승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35~39세 연령층 검색점유율

35~39세는 주간 변경이 크게 변동하고 있지만 Daum의 증가가 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40대 연령층 검색점유율


40대도 주간 변경이 크게 변동하고 있지만 Daum의 증가가 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0대 이상은 Daum의 점유율 증가세가 눈에 띕니다.

조금 허무한 결론이지만 결과적으로 초등학생을 제외한 전 연령층에서 Naver에서 Daum으로의 트랜지션이 발생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생은 상대적으로 아고라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다고 본다면 아고라의 영향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물리시간에 보면 정지된 물체를 한번 이동시키기까지 넘어야 하는 정지마찰력이 있는데, 현재 상태로는 2년간 답보상태에 있었던 Daum의 검색 점유율은 이 '정지마찰력'을 넘은 것 같습니다. 일부계층이 아닌 전 계층에서 어느정도의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한 참 뒤에서야 그 효과가 나타나는걸까요?


6월 이후 이동의 원인: 1. DB구축에 걸리는 시간, 2. Daum의 검색DB 확대 3. 본격적인 이슈화 4. NHN의 hangame사행성 이슈

그 원인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1. 신규유저가 검색까지 유입되기 까지 그 포털에 적응되고 기존까지 이용하던 포털을 벗어나기 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점,

2. 신규유저들의 유입은 실제로 5월부터 증가세에 있었지만 신지식, 카페DB공개 등의 검색개편이 4월부터 진행되어 DB를 쌓을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는 점,

3. 네티즌들에게 이슈를 던져주었던 ‘보수언론 광고주 불매운동’, ‘PD수첩 정당성논의’, ‘지상파 TV의 촛불시위에 대한 본격적 보도’ 등은 6월부터 시작
이 되었던 점,

4. NHN의 한게임의 사행성 및 NHN의 보수화에 대한 이슈제기도 6월부터 있어 편의성이 아닌 불매를 위해 NHN을 떠난 유저
들도 상당수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지난 7월 22일에 있었던 ‘Daum 메일 오류’사고가 본 검색량 변화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현재 Daum이 진행 중인 검색 체인지 업이라는 이벤트(1000명의 테스터를 선발하여 Daum검색서비스에 대한 서베이)를 함에 따라 유입된 일부의 트래픽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의 Daum 검색으로 이전이 불안해 보이는 이유는 Naver가 지식in란 차별화된 서비스를 내부적으로 만들어냄으로써 검색 수요자를 끌어들인 것이지만, Daum은 검색을 위해 방문했던 사람보다는 Daum에서 놀다가 ‘검색’을 사용하는 비율이 아직은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백 패스를 가로채서 골까지 넣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최소한 큰 정치적 현안이 사라지고 나서도 Daum의 검색점유율이 유지되는가를 봐야 합니다. 개인적인 ‘검색엔진’과 UI의 평가에서는 이제 두 기업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지식검색의 차이가 있었지만 사실 많은 앞선 유저들은 Wikipedia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물론 Daum은 현 정부와의 불편한 관계, 보수언론들의 기사제공 중지 등의 규제리스크와 컨텐츠확보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현재 맞이를 했습니다. 하지만 Daum이 보유한 정책의 개방성, 블로거들의 우호적인 컨텐츠 공급 등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역시 규제리스크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할지는 두고 봐야겠네요.


Daum의 잠재적 이슈: 외국기업으로 매각된다면?

Daum과 관련하여 한가지 잠재적인 이슈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경영권 매각에 대한 이슈일 것입니다. 이재웅 최대주주가 Daum의 모든 직함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하면서 ‘경영권 매각’에 대해 모락모락 이야기가 피어 올랐습니다. 잠재적인 매수자는 아래로 정리가 됩니다.

- Google: Daum의 광고영업을 하고 있으며, 검색엔진도 제공하며 협력관계를 구축하였으며 Daum경영진과의 지속적인 교류

- Ncsoft: 웹에 대한 김택진 사장의 높은 관심과 현재 오픈마루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와의 협력 진행, 3000억에 이르는 잉여현금의 활용, NHN의 포털+검색의 사업모델에 대한 벤치마킹

- KTH(KT계열): SKT와 비교할 때, 웹 플랫폼의 경쟁력이 부족하다. 망개방도 대비해야 한다는 점
- SKT: KTH와 마찬가지로 검색/커뮤니티 사업에 대해서는 욕심을 냄. 특히 Cyworld의 정체에 대한 고민에 대한 해결책.

- Softbank: 일본의 Yahoo Japan을 운영하고 있으며 한국의 포털사업의 서비스기획력과 테스트베드로서의 강점, 사업적 시너지/교류 가능

- 그 외 사모펀드

제가 생각의 범위를 넘어섰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를 표방하고 있는 기업이 외국업체로 매각이 될 때, 한국 내에 존재하는 ‘반 외국기업’이 크게 작용할 것 같습니다. 특히 Daum은 방송업체로 치면 종합편성을 할 수 있으며, 보도의 기능과 사회이슈에 대한 Agenda Setting 역할을 크게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국 사회의 영향력을 고려할 때 외국 기업으로의 매각은 어쩌면 네티즌의 큰 반발을 일으켜, 불 이용 운동 등도 발생할 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아직까지는 하나의 상상입니다만, 완전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죠.

이제 8월의 두 업체의 새로운 전투는 ‘올림픽’입니다. 아고라의 영역보다는 뉴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시점이라 최근 뉴스 공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Daum의 검색 점유율은 어떤 모습을 보일지 지켜봐야겠습니다.


Posted by Simon Cheong